갈등을 빚은 가맹점주와 마주앉아서 진아는 말한다.
"사는게 왜 이렇게 다 복잡한지. 젊다고 다 꽃놀이 세상인줄 아세요? 배신도 당하고 상처도 받고 그러다가 또 어디서 위로받으면 힘좀 내보고 그러다 또 좌절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찾을라고 노력하고 다 그래요. 다 똑같은 마음이에요." "알어... 다 먹고 살라고 그러는거지. 힘내"
진아의 말에서 젊은 직장인들의 애환이 그대로 느껴진다. 진아는 사는게 힘들다. 전 애인은 바람이 났고 준희는 오해때문에 토라져있고 그래서 상처받았다. 어디서 위로 좀 받고 싶은데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 아침부터 이 사람을 만나러 가서는 깡소주를 들이킨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이제는 모든 것을 놔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회사일은 회사 일대로, 집에서 규민이 때문에 생긴 오해는 준희와 풀어야 하는데 답답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소주를 들이킨다.
3회에서 가장 집중해서 봤던 씬이다. 준희네의 가족사가 처음으로 언급된다. 10년 전 쯤 겨울, 준희가 수능을 치르자 마자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빠는 재혼 후 둘을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그렇게 세상에 둘만 덜렁 남겨진 남매는 독하게 깡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아마도 경선이는 꿈을 접고 돈을 벌기위해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왔을 터. 작은 체구에서 강한 생활력이 느껴진다.
3회에서 가장 재미있게 봤던 씬이다. "준희가 어떤 여자랑 어떻게 살지 모르지만 나 악랄한 시누 될거다." 그러자 진아 표정이 순간 어두워지면서 머리가 복잡해진다. "눈치보고 사는걸 어떻게 봐 내가 초장에 휘어잡아야지." 말만 들어도 살떨린다는 진아. 정말 웃지 않고 배겨낼 도리가 없다. 이규민이 진아랑 준희를 엮는걸 듣고 코미디 같다는 경선. 웃기지 않냐고 하니까 떨떠름한 표정으로 카메라 앵글을 벗어나는 진아를 보면서 박장대소했다. 진아는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캐릭터다.
엄마의 제삿날. 진아 시집 잘 보내는게 소원이라는 경선. 그러나 진아와 준희가 연인이 되는 순간 이제는 절대로 과거의 절친사이로 돌아갈 수 없다. 준희와 진아가 잘되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실제로 마지막회에서 과거의 절친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소원한 친구 사이로 남는다. 준희와 진아가 만나면서 엄청난 상처들을 주고 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오히려 진아는 금보라와 더 가까운 사이가 되는데 비밀이 없는 절친사이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과거를 정리 한다며 들고 나왔지만 준희가 준 우산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준희가 내가 대신 버린다며 달라고 하자 버리려다 다시 가져왔다고 실토하는 진아. 그러자 우산이 맘에 들었냐고 놀려댄다. 티격태격 사랑싸움 하는 두 사람이 너무 귀엽다.
나중에 놀이터에서 나눴던 대화는 마지막회에서 비슷한 내용으로 반복된다. 서로를 향한 마음은 여전했기에 복잡한 설명없이 내우산 어딨냐고 달라고 했던 준희가 참 반갑고 이해가 됐다. 우산은 이 드라마에서 매우 중요한 소재로 활용된다. 그리고 올드팝이나 잔잔한 음악과 함께 활용되면서 아날로그 감성을 건드린다.
바래다 주는 길에 현관문을 막고 서는 준희. 대뜸 놀러가자니까 환하게 웃으며 망설임도 없이 그러자고 하는 진아. 준희는 남자로 진아는 여자로 서로를 솔직하게 마주했다. 오해를 풀고 마음을 확인하고 그렇게 첫 데이트 길에 올랐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더이상의 오해 없이 남녀 사이로 쭉 이어진다.
명색이 첫 데이트인데 진아의 차림새가 소탈하다. 평상복 차림에 화장기도 없는 진아의 모습 그대로다. 그러건 말건 준희는 진아가 마냥 좋다. 나는 준희 앞에서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진아가 좋다.
이 드라마에서 지나치게 격식있는 차림새와 짙은 화장은 진아를 부자연스럽게 만든다. 이것은 의례적인 형식, 껍데기를 의미한다. 드라마 후반부에 맞선 남자를 보러 나가면서 화장하는 진아를 보고 욕한 분들을 난 이해할 수 없다. 드라마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누나한테 그림을 선물하는 준희. 작고 귀엽단다. 그래서 얼굴은 귀엽게 몸은 작게 그려줬다. 자신이 느끼는 그대로 그려줬다. 웃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집에 가서는 가장 아름답고 예쁘게 그려줬다. 감탄사가 육성으로 터져나왔다. 이런 디테일은 도대체 어느 드라마에서 찾아봐야 하는 걸까. 나는 한동안 타드라마 절식 상태에 빠질 것 같다.
밤 늦게까지 준희와 놀던 진아는 방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출근했다. 예쁘게 입고 나가려고 얼마나 분주했을지 이 한 컷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는 이런 빈공간 연출을 사랑한다.
준희는 고백하려다 머뭇거린다. 그러다 결국 밥 사달라는 말을 내뱉는다. 그러자 진아는 언제는 안사줬냐며 그게 무슨 그렇게 뜸을 들일 얘기냐고 어이없어 한다. 그러나 사실 진아의 마음은 답답해 죽을 지경이다. 이제는 원하는 말이 준희 입에서 나올 때가 됐는데 먼저 말해도 되는건가 조심스럽다.
이렇듯 준희는 타이밍을 놓치고 오히려 확실하게 잡는 쪽은 언제나 진아였다. 준희는 마지막회에 진아가 없는 텅빈 방을 찾아갔을 때까지도 타이밍을 놓친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제주도로 내려가 처음으로 타이밍을 잡았기에 진아와 다시 맺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준희는 진아의 어깨를 감싸주고 싶어 안달이다. 진아는 준희의 이런 마음을 아는듯 모르는듯 설레는 기분을 만끽한다. 썸타는 남녀의 감정을 이토록 아름답게 그려낸 작품을 난 일전에 본 기억이 없다. 너무나 예쁘고 황홀해서 모니터에 빨려들어갈 지경이다. 마치 내가 연애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차를 탔는데 묘한 긴장감과 함께 침묵이 흐르고 준희는 손잡을 타이밍을 한 번 놓친다. 그러자 진아가 슬쩍 팔을 들어올려 손잡을 타이밍을 만들어준다. 심장이 쿵쾅쿵쾅 심하게 방망이칠 지경이구만 준희는 이번에도 타이밍을 놓친다. 진아는 답답해서 미쳐 죽을 지경이다. 준희는 멋있는 척해도 알고보면 허당이다.
좋아하는 여자가 있고 나는 확신이 있는데 아직 못물어봤다는 준희. 진아한테 해야할 말을 허공에다 뿌리고 있다. 진아는 안도의 숨을 쉬면서도 불안불안하다. 그러다 강세영이 준희한테 훅 치고 들어오자 더이상 참지 못하고 슬며시 먼저 손을 잡는다.
드라마 보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발을 동동 구른 건 12년전 '연애시대' 이후 처음이다. 다음 회를 기다리는 하루가 일 년 처럼 느껴졌다.
진아가 준희의 손을 먼저 잡은 대가는 실로 엄청났다. 스스로를 더욱 사랑하게 됐지만 그로인해 많은 것을 잃고 아파했다. 그러나 진아는 끝까지 준희에 대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고 긴 시간 먼 곳을 돌고돌아 다시 만났다. 이또한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다.
지인 작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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