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4회 - 첫 여행 -

2018. 6. 28. 17:31


서로가 일하는 공간에 상대방이 찾아왔을 때 둘은 똑같은 일을 경험한다. 느닷없이 동료가 들이닥쳐서 허겁지겁 당황하다가 택시태워 보내고 다시 회사로 전력질주한다. 그 모습을 창문을 통해 서로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웃는다. 
2회에서 진아는 일단 불부터 켜고 준희를 찾으러 다니는 반면 준희는 1차적으로 진아가 서있던 자리에 들렀다가 불켤 생각도 안하고 허겁지겁 찾으러 다닌다. 난 이 두 장면을 굉장히 인상깊게 봤다. 여자는 아무리 급한 상황에도 냉정한 이성을 찾으려 한다면 남자는 감정이 앞서 막무가내다.
준희가 진아를 떠난 과정을 곱씹어 볼 때 진아는 상대적으로 이성적이었고 준희는 충동적이었다. 진아는 준희의 짐이 되길 원하지 않았고 아무리 힘들어도 곁에서 힘이 되어주길 원했다. 미국으로 함께 떠나는 것은 서로를 위한 길이 아니었음을 진아는 알고있었다.

전 남자친구가 가게에 찾아와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돌아갔다. 다치고 성추행 당할 뻔한 진아를 두고 경선은 마음이 아프다. 그러면서 모진말을 쏟아낸다. 당한는건 1등에 악소리 한번 낼줄도 모르고 착한건 자랑이 아니라 병이라고. 진아는 지금까지 남들이 보면 미련해 보일정도로 그렇게 살아왔다. 그래서 진아가 더 안쓰럽다. 그러나 진아는 준희를 만나 달라진다. 더이상 미련하게 착해빠진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준희와 같이 간 당진출장. 진아는 공철구한테 더이상 탬버린 치고 불쾌한 스킨십 참는 그런건 안한다고 선언한다. 당황하는 공철구. 그러나 진아는 이런 말을 해본게 처음이라서 걱정도되고 불안하다. 그래서 준희한테 그냥 위로 받고 싶다. "잘했어"
드라마 상 처음으로 진아가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상징적인 장면이다. 작지만 큰 변화가 앞으로 어떤 폭풍을 몰고오게 될 지 이 장면에서는 상상하지 못했다. 회사 내에서 성추행 문제가 불거지자 여직원들이 공동대응 할 것처럼 분위기가 흘러가더니 다들 쏙 빠지고 진아만 덜렁 혼자 남았다. 준희가 곁에 없는 상황에서 진아는 홀로 외로운 싸움을 3년이나 버텨냈다.

걱정하지 말라며 잘 헤쳐나가면 된다는 준희. 그러면서 이어지는 대사가 재밌다. "절대 후회 안하게 내가 잘할게" "믿어두돼?" "믿어도돼." "아니면?" "말구지" 장난처럼 던진 이 한마디는 현실이 됐고 어쩌면 무책임하게 진아를 두고 훌쩍 떠나버린 셈이 됐다. 말은 씨가 된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첫키스 씬. 근래에 드라마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키스 씬을 본적이 없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넋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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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취한 누나를 집에 데려다 주고 물끄러미 사진을 바라보다가 불을 끄고 나가는 준희. 지난 리뷰에서도 언급했지만 이제 두 사람은 절대 과거의 절친사이로 돌아갈 수 없다. 상징적이면서도 강렬한 연출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런 연출을 사랑한다.

비오는 날 준희의 우산 속으로 성큼 뛰어갔던 진아가 이제 준희가 사는 집으로 쏙 들어갔다. 드라마에서 준희 집을 찾은건 이 씬이 처음은 아니지만 들어간건 처음이다. 두 사람의 공간이 된 준희의 집에서 이제 그 둘은 달콤하고 뜨거운 사랑을 나눌 것이다. 서로 좋아할 땐 열렬히 미친듯이 불사르는거라고, 뜨거워야하는 거라고 했듯이.


지인 작가, 영화평론가

destiny2135@gmail.com

어린지인 드라마 리뷰

[리뷰]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3회 - 고백 -

2018. 6. 24. 10:21


갈등을 빚은 가맹점주와 마주앉아서 진아는 말한다.
"사는게 왜 이렇게 다 복잡한지. 젊다고 다 꽃놀이 세상인줄 아세요? 배신도 당하고 상처도 받고 그러다가 또 어디서 위로받으면 힘좀 내보고 그러다 또 좌절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찾을라고 노력하고 다 그래요. 다 똑같은 마음이에요." "알어... 다 먹고 살라고 그러는거지. 힘내"
진아의 말에서 젊은 직장인들의 애환이 그대로 느껴진다. 진아는 사는게 힘들다. 전 애인은 바람이 났고 준희는 오해때문에 토라져있고 그래서 상처받았다. 어디서 위로 좀 받고 싶은데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 아침부터 이 사람을 만나러 가서는 깡소주를 들이킨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이제는 모든 것을 놔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회사일은 회사 일대로, 집에서 규민이 때문에 생긴 오해는 준희와 풀어야 하는데 답답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소주를 들이킨다.

3회에서 가장 집중해서 봤던 씬이다. 준희네의 가족사가 처음으로 언급된다. 10년 전 쯤 겨울, 준희가 수능을 치르자 마자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빠는 재혼 후 둘을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그렇게 세상에 둘만 덜렁 남겨진 남매는 독하게 깡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아마도 경선이는 꿈을 접고 돈을 벌기위해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왔을 터. 작은 체구에서 강한 생활력이 느껴진다.

3회에서 가장 재미있게 봤던 씬이다. "준희가 어떤 여자랑 어떻게 살지 모르지만 나 악랄한 시누 될거다." 그러자 진아 표정이 순간 어두워지면서 머리가 복잡해진다. "눈치보고 사는걸 어떻게 봐 내가 초장에 휘어잡아야지." 말만 들어도 살떨린다는 진아. 정말 웃지 않고 배겨낼 도리가 없다. 이규민이 진아랑 준희를 엮는걸 듣고 코미디 같다는 경선. 웃기지 않냐고 하니까 떨떠름한 표정으로 카메라 앵글을 벗어나는 진아를 보면서 박장대소했다. 진아는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캐릭터다.

엄마의 제삿날. 진아 시집 잘 보내는게 소원이라는 경선. 그러나 진아와 준희가 연인이 되는 순간 이제는 절대로 과거의 절친사이로 돌아갈 수 없다. 준희와 진아가 잘되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실제로 마지막회에서 과거의 절친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소원한 친구 사이로 남는다. 준희와 진아가 만나면서 엄청난 상처들을 주고 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오히려 진아는 금보라와 더 가까운 사이가 되는데 비밀이 없는 절친사이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과거를 정리 한다며 들고 나왔지만 준희가 준 우산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준희가 내가 대신 버린다며 달라고 하자 버리려다 다시 가져왔다고 실토하는 진아. 그러자 우산이 맘에 들었냐고 놀려댄다. 티격태격 사랑싸움 하는 두 사람이 너무 귀엽다.
나중에 놀이터에서 나눴던 대화는 마지막회에서 비슷한 내용으로 반복된다. 서로를 향한 마음은 여전했기에 복잡한 설명없이 내우산 어딨냐고 달라고 했던 준희가 참 반갑고 이해가 됐다. 우산은 이 드라마에서 매우 중요한 소재로 활용된다. 그리고 올드팝이나 잔잔한 음악과 함께 활용되면서 아날로그 감성을 건드린다. 

바래다 주는 길에 현관문을 막고 서는 준희. 대뜸 놀러가자니까 환하게 웃으며 망설임도 없이 그러자고 하는 진아. 준희는 남자로 진아는 여자로 서로를 솔직하게 마주했다. 오해를 풀고 마음을 확인하고 그렇게 첫 데이트 길에 올랐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더이상의 오해 없이 남녀 사이로 쭉 이어진다.

명색이 첫 데이트인데 진아의 차림새가 소탈하다. 평상복 차림에 화장기도 없는 진아의 모습 그대로다. 그러건 말건 준희는 진아가 마냥 좋다. 나는 준희 앞에서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진아가 좋다.
이 드라마에서 지나치게 격식있는 차림새와 짙은 화장은 진아를 부자연스럽게 만든다. 이것은 의례적인 형식, 껍데기를 의미한다. 드라마 후반부에 맞선 남자를 보러 나가면서 화장하는 진아를 보고 욕한 분들을 난 이해할 수 없다. 드라마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누나한테 그림을 선물하는 준희. 작고 귀엽단다. 그래서 얼굴은 귀엽게 몸은 작게 그려줬다. 자신이 느끼는 그대로 그려줬다. 웃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집에 가서는 가장 아름답고 예쁘게 그려줬다. 감탄사가 육성으로 터져나왔다. 이런 디테일은 도대체 어느 드라마에서 찾아봐야 하는 걸까. 나는 한동안 타드라마 절식 상태에 빠질 것 같다.

밤 늦게까지 준희와 놀던 진아는 방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출근했다. 예쁘게 입고 나가려고 얼마나 분주했을지 이 한 컷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는 이런 빈공간 연출을 사랑한다.

준희는 고백하려다 머뭇거린다. 그러다 결국 밥 사달라는 말을 내뱉는다. 그러자 진아는 언제는 안사줬냐며 그게 무슨 그렇게 뜸을 들일 얘기냐고 어이없어 한다. 그러나 사실 진아의 마음은 답답해 죽을 지경이다. 이제는 원하는 말이 준희 입에서 나올 때가 됐는데 먼저 말해도 되는건가 조심스럽다.
이렇듯 준희는 타이밍을 놓치고 오히려 확실하게 잡는 쪽은 언제나 진아였다. 준희는 마지막회에 진아가 없는 텅빈 방을 찾아갔을 때까지도 타이밍을 놓친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제주도로 내려가 처음으로 타이밍을 잡았기에 진아와 다시 맺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준희는 진아의 어깨를 감싸주고 싶어 안달이다. 진아는 준희의 이런 마음을 아는듯 모르는듯 설레는 기분을 만끽한다. 썸타는 남녀의 감정을 이토록 아름답게 그려낸 작품을 난 일전에 본 기억이 없다. 너무나 예쁘고 황홀해서 모니터에 빨려들어갈 지경이다. 마치 내가 연애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차를 탔는데 묘한 긴장감과 함께 침묵이 흐르고 준희는 손잡을 타이밍을 한 번 놓친다. 그러자 진아가 슬쩍 팔을 들어올려 손잡을 타이밍을 만들어준다. 심장이 쿵쾅쿵쾅 심하게 방망이칠 지경이구만 준희는 이번에도 타이밍을 놓친다. 진아는 답답해서 미쳐 죽을 지경이다. 준희는 멋있는 척해도 알고보면 허당이다.

좋아하는 여자가 있고 나는 확신이 있는데 아직 못물어봤다는 준희. 진아한테 해야할 말을 허공에다 뿌리고 있다. 진아는 안도의 숨을 쉬면서도 불안불안하다. 그러다 강세영이 준희한테 훅 치고 들어오자 더이상 참지 못하고 슬며시 먼저 손을 잡는다.

드라마 보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발을 동동 구른 건 12년전 '연애시대' 이후 처음이다. 다음 회를 기다리는 하루가 일 년 처럼 느껴졌다.
진아가 준희의 손을 먼저 잡은 대가는 실로 엄청났다. 스스로를 더욱 사랑하게 됐지만 그로인해 많은 것을 잃고 아파했다. 그러나 진아는 끝까지 준희에 대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고 긴 시간 먼 곳을 돌고돌아 다시 만났다. 이또한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다.

지인 작가, 영화평론가
destiny2135@gmail.com


어린지인 드라마 리뷰

[리뷰]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2회 - 빨강우산 -

2018. 6. 23. 18:54

2회 리뷰부터는 마지막회에 대한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원치 않으신 분들은 드라마를 다 시청하시고 읽어주세요.

이 드라마에서는 회사내 성추행 문제가 다뤄진다. 노래방에서 공철구가 어찌나 몸을 더듬던지 불쾌했다며 하소연하는 후배. 이어지는 대사가 재밌다. "너한테 맡기고 온 내가 잘못이다. 다음엔 내가 다 커버해줄게 오늘은 그냥 퉤퉤퉤하고 그냥 잊어버려" 성추행의 근원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다음엔 기꺼이 너 대신 내가 상대해 주겠노라는 태도다.
진아는 준희를 만나 진짜 사랑을 알기 전까지는 그렇게 살아왔다. 준희를 만나고 자신을 더욱 사랑하게 되자 전에는 대수롭지 않은 것들에 대해 불편해하기 시작했다. 자기애가 더욱 강해져서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으로 변화한다. 그러나 조직의 저항은 만만찮았다. 먼 곳으로 밀려나 홀로 버텨낸 고통의 시간들이었다. 

친구와 친척들한테서 온 청첩장을 보며 결혼할 상대방 집안 얘기를 꺼내는 진아네 부모. 여기서 엄마의 속물적 근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딸의 행복을 위해서 조건을 우선했지만 진아는 오히려 그런 남자들을 만나 불행했다. 하지만 진아는 준희를 만나 제일 행복해 했다.
한국에서 남녀가 만나 결혼하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다. 유교문화가 뿌리박힌 한국에서는 결혼을 집안 대 집안의 결합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이것저것 재고 따지는 것들이 많은데 이 과정에서 결혼 자체가 무산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관계맺기의 복잡성 때문에 젊은이들이 지쳐 나가떨어진다. 시대는 변해도 어른들은 여전히 과거의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본인이 게을러 결재를 안한 잘못을 윤진아한테 덮어 씌우려는 남호균 이사. 정영인 부장한테 걸려 제대로 당하고 있다. 우리 드라마에서는 고위급 남자직원들의 무책임과 무능이 강조되고 있다. 문제는 아랫사람들에게 책임이 전가되어 힘들게 만든다는 것. 가맹점주와의 마찰로 동분서주 열심히 수습하고 다니는 윤진아 임에도 가차없다. 잘못을 저질러놓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부하직원을 매정하게 희생시킨다. 우리나라 조직 문화의 서글픈 현실이다. 

술집에서 마주앉은 두 사람. 사소한 오해로 티격태격 거리다가 비가 내려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아름다운 진아와 준희.

이어지는 대사가 재밌다. "야, 남자들은 이쁘면 그냥 마냥 좋냐?"  "좋지"  "재수없어"  "누나가 더이뻐”
이쁘면 좋냐고 물었는데 누나가 더 이쁘다고 대답했으니 누나가 좋단 말과 다르지 않다. 돌려서 말했지만 순간 진아는 당황했고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고백만 하지 않았을 뿐 이미 두 사람의 마음은 서로를 향하고 있었다. 사실상 진아와 준희의 사랑은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보면 된다.


드라마에서 비와 우산은 두 사람을 묶어주는 강력한 장치로 등장하는데 이는 마지막회까지 쭉 이어진다. 그런데 이 장면이 매우 흥미롭다. 가서 우산을 씌워 줄 수도 있었는데 왜 굳이 오라고 했을까. 비가오면 우산은 비를 피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준다. 그 공간은 준희의 마음을 비유한다. 준희는 오라고 손짓하고 진아는 비를 맞으며 그 공간으로 쏙 들어간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공간활용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드라마가 예술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리 드라마같은 모습일 것이다. 이는 마지막회까지 이어지는데 이번에는 진아가 성큼성큼 다가가 우산을 씌워준다. 오랜시간 멀리서 돌아와준 준희를 진아의 마음이 품어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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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희는 진아한테 빨강우산을 선물로 줬다. 준희 마음의 징표인 빨강우산이 이렇게 진아한테 건너갔다. 나중에는 진아가 준희한테 준 초록우산까지 모두 진아한테 건너오게 되고 진아는 이것들을 버리고 제주도로 떠난다. 그리고 노랑우산 아래서 다시만나 고단했던 사랑을 완성시킨다.
이처럼 우리 드라마는 우산 아래서 시작해 완성된 작품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사실 한글원제보다 영어제목인 'Something in the Rain"을 더 좋아한다. 뭐라고 번역해야 할지 애매하지만 영어가 오히려 드라마를 빛내주고 있지 않은가.

지인 작가, 영화평론가
destiny2135@gmail.com


어린지인 드라마 리뷰

[리뷰]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1회 - 첫 만남 -

2018. 6. 22. 17:43

드라마 종영 후 리뷰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부분은 모여 전체를 이루고 그 맥락 속에서 부분은 살아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근차근 다시 보다보면 처음에는 미처 깨닫지 못한 것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신문기사에서 우연히 안판석 감독님께서 새 드라마를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캐스팅된 배우는 손예진, 정해인. 남자 배우는 누군지 몰랐고 손예진은 12년이 지난 지금에도 인생드라마 1위에 올라있는 '연애시대'의 여주인공이다. 그리고 '하얀거탑' '밀회'를 연출하신 감독님 작품이라 믿고 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문기사를 일찍 접하고 1회부터 볼 수 있었던 나는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제작발표회도 챙겨봤고 감독님이 어떤 의도로 드라마를 만들고 있는가에 대해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상투적인 멜로가 아닌 진짜 현실연애를 다루면서 시청자들과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다면 드라마는 성공한 것이라고 한 인터뷰가 인상에 남는다. 시청률에 연연하지 않고 내달리되 10년 20년 후에도 사랑받을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다고 한 감독님을 보면서 존경심이 생겼다.
난 안판석 감독님의 연출 스타일을 사랑한다. 빈공간이 많아 때론 어렵고 불친절해서 관객들의 외면을 받기도 하지만 상상력을 자극하는 독특한 연출 스타일 덕에 내가 살아있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혹자는 텔레비젼을 '바보상자'라고 욕하지만 이 드라마를 두고는 감히 그런 평가를 내릴 수 없다. 마치 소설책 읽듯이 생각하고 곱씹으며 여러 번 읽을 때마다 그윽한 향기가 퍼지는 드라마를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리뷰를 쓰는 것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나를 위한 것이다. 완전히 현실세계의 인물처럼 살아 움직였던 진아와 준희를 한번 쯤 정리하고 객관화해야 비로소 나는 그들과 쿨하게 헤어질 수 있다.


진아는 드라마가 시작하자마자 남자친구한테 차인다. "우리 사이가 곤약 같애" 말 한마디와 함께. 진아는 남자보는 눈이 없어서 그렇게 매번 차이고 다닌다.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들이 사랑이 아니었고 진짜 사랑은 안해봤으니까. 연애도 맘대로 안되고 일에 치이고 무기력한 일상이 반복되던 어느 날 준희가 짠하고 나타났다. 3년 간의 미국지사 파견을 마치고 본사의 호출로 돌아오게 된 것.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기대고 싶던 딱 그순간 자꾸만 웃음짓게 만드는 준희한테 저도 모르게 감정이 뻗어나간다.

회사일에 지친 진아를 달래주며 준희는 "금기를 넘어서야 프로지" 라는 말을 한다. 금기를 넘어서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나는 짐작했다. 금기를 넘어선 두 사람의 사랑이 어떤 대가를 치르고 어떻게 이별하는지 드라마는 그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나간다.

누나한테 밥 사달라는 준희. 동생처럼 밥 사달라고 졸라대는 건 연인이 되기 전이니까 가능하다. 진아는 외근이 많아서 시간 맞추기 힘들다며 이렇게 말한다. "계속 찔러봐. 시간 맞아 떨어지는 날 있으면 니가 원하는건 뭐든 쏠께." 소름돋는 대사다. 나는 이 대사를 "나 지치고 힘든데 계속 찔러봐. 타이밍이 맞아 떨어지면 니가 원하는대로 뭐든 할게" 라고 들었다.

연인한테 배신 당하고 상처입어 울고 있는 진아. 준희는 그저 지켜보고 자리를 피해주는 것 밖엔 해줄게 없다. 진아가 당면하는 문제들이 늘 그렇다. 회사 일이든 가족 문제든 본인이 해결해야 할 몫이지 이를 준희한테 넘기는 순간 짐이 되고 만다. 준희가 대신해 줄 수 없는 그러한 것들이다. 그래서 진아는 준희가 늘 그자리에 있어주길 바랐다. 힘들어도 같이 견디며 이겨나가주길 원했다. OST 'Stand by your Man' 번역하면 '그 사람 곁에서 힘이 되어 주세요' (여기서 Man은 성을 구분하는 개념이 아닌 일반 사람을 의미한다.)

울다 지쳐 곤히 잠든 진아. 이런 진아를 준희는 마음에 담는다.(준희의 카메라에 진아가 찍혀 들어왔다 !!!) 느닷없이 준희의 마음에 들어간 진아는 놀라 당황하고 준희는 이 상황을 은근히 즐긴다. 이때부터 오해하고 질투하고 설레는 썸남썸녀의 모습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긴다.

내가 가장 애정하는 엘리베이터 씬이다. 두 사람의 감정이 깊어질수록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머뭇거리는 정도가 강해진다. 진아네 아파트 엘리베이터 씬은 어림잡아 10번 이상 등장하고 회사 건물 1층은, 엘리베이터 앞은 출근길 만남의 장소로 매번 애용된다. 심지어 진아와 준희가 연애할 때 노는 장소나 들르는 가게도 거의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일상은 특별한 일 없이 지루하게 반복되는 그 무엇이다. 그러다가 불쑥 새로운 사랑이 일상으로 파고들어 균열을 만들고 반복되는 일상에 지루할 틈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어른들은 연애를 하는 것이다. 일상의 균열이 때로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사람은 그러한 변화를 견디고 받아들이는 만큼 성장한다. 그래서 나는 이 드라마가 가지는 '일상성'을 매우 사랑한다.

밥 사달라고 해놓고는 오히려 밥을 사는 준희. 준희한테 진아는 더이상 누나가 아니라 여자다. 본인 역시 밥 사달라 조르는 동생이 아니라 남자가 되고싶다. 맛있게 밥 잘 먹었다는 진아에게 준희가 한마디 툭 던진다. "맛을 봤으니 윤진아 이제 큰일났다" 소름돋는 대사가 아닐 수 없다. 금기를 넘어 사랑에 빠지고 진짜 큰일이 벌어진다. 사랑은 달콤했지만 상처는 너무나 컸다. 진짜 사랑이 뭔지 모르는 진아에게 준희는 진짜 사랑을 가르쳐주고 떠나버렸다.

1회의 모든 부분을 통틀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장면이다. 나는 이 드라마가 인생드라마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준희에게 진아는 특별히 꾸미지 않는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 예쁘게 차려입거나 화장하지 않아도 그저 진아가 좋다. 실제 진아는 준희 앞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행동하며 제일 사랑스럽다. 다른 남자들 앞에서는 격식있게 차려입고 예쁘게 꾸미고 나가도 부자연스럽게 행동한다. 아무리 외모를 예쁘게 치장해도 남자들은 그 화장 속에 가려진 진짜 진아를 보려고도 사랑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매번 차이는 것. 그러나 준희는 다르다.
늦은 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꾸밈없이 자신을 드러내놓고 자유를 만끽하는 진아가 사랑스럽다. 그걸 흐뭇하게 바라보는 준희. 내가 어찌 이 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지인 작가, 영화평론가
destiny2135@gmail.com


어린지인 드라마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