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 〈러브레터〉 이해와 감상 - 하편

2018. 12. 18. 18:27



히로코는 그가 잠들어 있는 산을 마주하고 섰다. 2년이 지났지만 옛 연인의 죽음은 그녀의 삶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해돋이를 맞으며 작별인사를 한다. “오겡끼데쓰까. 와따시와 겡끼데쓰” (잘 지내고 있나요? 전 잘 지내요)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반복되는 이 대사는 지금까지도 한국인들 사이에서 너무나 유명하다. 그런데 이어지는 장면의 영화적 화법이 매우 흥미롭다. 사경을 헤메다 다시 생으로 돌아오는 이츠키가 히로코의 말을 그대로 받아서 의식을 되찾는 장면이 여러 번 교차편집된다. 히로코는 작별인사와 함께 그 사람을 놓아주며 죽음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고 이츠키는 죽음에서 다시 삶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그의 사랑을 받아 안는다. 이렇게 이야기 구조가 굉장히 치밀하게 짜여져 있다. 두 사람의 삶이 극적으로 교차하는 지점을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이런 화법은 이 영화의 깊이와 수준을 가늠하게 한다.

 
정초부터 아버지 장례식을 치르느라 온 집안이 떠들썩 했고 어머니가 몸져 눕는 바람에 女이츠키는 며칠 간 학교에 나가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男이츠키가 불쑥 집으로 찾아왔다. 겨울방학 전에 빌린 책을 대신 반납해달라는 부탁 때문이었다. 이유를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男이츠키의 전학은 사랑의 죽음을 의미하고 아버지의 죽음과도 연결되어 있다. 앞서 감기 때문에 병원을 찾았을 때 아버지와 함께 그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 난 것은 이런 까닭이다. 두 사람은 집 앞에서 그렇게 헤어졌다. 男이츠키의 무뚝뚝한 듯 아쉬워하는 표정과 활짝 웃고 있는 女이츠키의 모습이 대조되면서 안타까움이 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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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만 일주일 늦은 새학기 첫 날, 그가 급하게 전학을 간 사실을 알게됐다. 애들의 장난으로 그의 책상위에 올려진 꽃병은 마치 죽음을 상징하는 듯한 불길함이 느껴진다. 그녀는 갑자기 꽃병을 바닥으로 내리쳐 깨뜨린다. 자신도 모르게 좋아했던 남자가 작별인사도 없이 부탁만을 남기고 가버린 분노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츠키는 그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준다.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 책은 지루한 만연체에다가 분량이 많고 미술사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으면 읽기 어렵다고 한다.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빌려서 그녀에게 대신 반납해 달라고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도서카드는 이름이 채워지면 새 걸로 교체되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은 이름이 고스란히 남아서 오랜 세월을 그대로 간직하게 된다.


그는 아름다운 중학시절의 추억을 선물하고 천의 바람이 되어 사라졌다. 책 반납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그를 잠시 잊었지만 그 책은 운명적으로 그녀를 다시 찾아온다.


히로코는 그동안 자신이 받았던 편지들을 돌려보낸다. 미스터리가 풀린 이후부터 주고 받았던 편지들은 사실상 女이츠키가 잊어버렸던 추억을 다시 찾아가는 여정과 다름 없었다. 그녀에게 그렇게 추억을 선물하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가 도서카드에 쓴 이름들이 당신 이름인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드네요’


사람에게 집이 소중한 이유는 건물 그 자체보다 그 공간과 함께 쌓인 세월과 추억의 두께 때문일 것이다. 낡고 허름할 지 몰라도 할아버지에게 이 집은 이츠키가 태어날 때 심은 나무와 오랜 세월 가족이 함께 지낸 의미있는 곳이다. 아들의 죽음과 손녀의 생명이 오고 갔던, 역사가 스며들어 있는 진중한 공간이다. 이 집은 할아버지의 인생과 같다. 그래서 이사가는 것을 늘 반대했다.


집으로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도서부 후배들은 멋진 걸 발견했다면서 책 한 권을 건넸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가 마지막으로 반납을 부탁했던 책이 10년 만에 이츠키한테 돌아왔다. 그동안의 시간들은 그녀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사춘기 시절 풋풋했던 첫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도서카드에 소녀의 예쁜 그림이 따뜻하게 남아있다. 그녀를 생각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떠오른다. 떠난 이가 남기고 간 마음이 10년의 세월을 거슬러 사랑했던 사람에게 닿는다는 설정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첫사랑인 지도 몰랐던 마음을 확인하고 그의 사랑을 받아들인 그녀는 감동한다. 女이츠키의 머리 위로 따스하게 내려 비추는 햇살과 머리카락을 스치우는 바람이 인상에 남는다. 사람은 죽어서 자연의 일부가 되고 햇살과 바람이 되어 마치 그녀 곁에 머무는 것처럼...


마지막 대사 “가슴이 아파서 이 편지는 보내지 못하겠습니다”는 많은 한국인들의 가슴을 울렸는데 사실은 명백한 오역이다. 쑥쓰러워서, 부끄러워서, 민망해서 정도가 맞는 표현이다. 하지만 오역이 오히려 영화의 톤을 확 바꾸어 분위기를 더 잘 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평론

영화의 변두리 이야기


〈러브레터〉는 1995년 일본 이와이 슌지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이다. 1998년 일본 문화 개방 이후 2번째로 상영된 일본영화이며 그 전에 이미 국내에 수십만 불법 비디오가 유출될 정도로 한국인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던 작품이다. 1999년 공식적으로 국내 개봉 당시 1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으며 한동안 일본 실사 영화 중에서 〈러브레터〉의 관객 수를 뛰어넘는 작품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한국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반면 일본에서는 한국에서만큼 잘 알려지고 흥행한 작품은 아니었다. 하지만 작품성을 인정받아 일본 유수의 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받았고 일본의 저명한 영화 잡지에서 1995년 최고의 영화로 뽑히기도 했다. 일본 홋카이도 오타루의 설원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영상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며 한 때 한국인들 사이에서 촬영지 여행 붐이 일기도 했다.

영화의 구조와 미학적 성취


〈러브레터〉는 첫사랑을 중심소재로 다루면서 삶과 죽음, 집과 가족의 의미를 섬세하게 터치하고 있다. 로맨스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치밀한 이야기 구조와 아름다운 영상미가 어우러져 미학적으로 대단한 성취를 이뤄냈다. 영화의 전반부는 미스터리한 인물 구도가 가지는 긴장감을 활용하여 이야기를 풀어내고 후반부는 여주인공의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마무리된다.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한 여자가 옛 연인을 떠나보내고 다른 여인이 그 사람을 받아안는 구조는 영화적 화법의 아름다움을 갖췄다. 영화는 시간의 흐름도 예술적으로 활용한다. 따뜻한 봄 중학교 입학식 날 처음 만난 두 남녀 주인공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랑이 무르익고 겨울이 되어 헤어진다. 그리고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봄날 첫사랑의 감정을 확인하며 영화가 끝난다. 또한 아버지의 죽음과 男이츠키의 전학을 연결시켜 자연스럽게 현실세계로 추억을 소환하는 방식은 영화가 시간을 다루는 미적 감각을 예술적으로 드러낸다. 

영화의 주제 - 삶과 죽음, 집과 가족의 의미


이 영화는 ‘집’의 의미가 중요하게 다뤄진다. 할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가족들의 원망 때문에 소외된 노인이며 그 때문에 가족들 간의 유대관계는 깨져있는 상황이다. 이츠키의 어머니가 집을 헐고 새로운 곳으로 이사가려고 하는 것은 가족들 사이의 끈끈함이 허물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나중에 이츠키가 감기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손녀를 들쳐 업고 목숨을 살리면서 가족 관계는 다시 회복된다. 이사가지 않고 집이 먼저 허물어질지 노인이 먼저 돌아가실지 지켜보겠다고 한 말은 그런 의미다. 할어버지에게 집이란 이츠키의 탄생과 아들의 죽음이 교차한 공간이며 오랜 세월 인생을 함께한 역사와 같다. 그래서 늘 이사를 반대해왔던 것이다.


삶과 죽음의 문제는 영화의 서브테마로서 역시 비중있게 다뤄진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죽음의 영향력 아래 살아간다. 히로코와 男이츠키의 가족들은 여전히 그의 죽음에 붙잡혀있고 女이츠키는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느슨해진 가족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렇지만 히로코는 죽음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으로 달려가고 女이츠키 가족들은 결정적인 계기로 관계를 회복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인간은 죽은 이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으나 그럼에도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제의식이 자연스럽게 묻어난다. 

마무리하는 말


〈러브레터〉는 첫사랑의 풋풋한 감성과 함께 묵직한 주제의식을 포함하는 훌륭한 영화다. 로맨스영화의 영화적 완성도가 수준에 이르면 어떤 모습인가에 대한 하나의 답을 제시했다. 그러나 사랑과 남녀 관계에 있어서 여성을 수동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 3대가 모여 사는 전통적인 가족관계를 중요시 하는 등의 보수적인 정서가 현대적 관점에 비추어 아쉬운 부분이 있다. 무려 23년 전 영화라서 당시 일본사회와 우리나라의 보수성을 감안하고 봐야한다. 그럼에도 뜨악할 부분은 한 사람의 인생에서 사랑은 한 번 뿐이라는 진실이다. 히로코 입장에서 男이츠키는 망할 놈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남기고 간 마음을 소중하게 생각했기에 영화는 아름답게 그려질 수 있었다. 사족을 하나 달자면 두 여인은 편지를 여러차레 주고 받았지만 이츠키의 죽음 그리고 아버지가 감기로 돌아가셨다는 내용처럼 죽음에 대한 것은 편지에 남기지 않았고 보내지 않았다. 편지에서 어떤 이야기를 주고 받았는지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도 영화를 즐기는 하나의 방법이 되지 않을까...

지인 작가, 평론가
destiny2135@gmail.com

= 일부내용참고 =

러브레터(일본영화) - 나무위키



어린지인 영화 평론

영화평론 〈러브레터〉 이해와 감상 - 상편

2018. 12. 18. 18:16

장면에 대한 언급 없이 영화의 이해와 감상을 논하는 것은 허구라고 생각합니다.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들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한 여자가 눈을 감고 숨을 참은 채 하얀 설원 위에 누워있다. 이윽고 눈을 떠 숨을 터트리고 깨끗한 눈밭에 발자국을 남기며 성큼성큼 걸어나간다. 첫 장면은 사실상 유사죽음과 같다. 이 영화는 와타나베 히로코가 죽음으로부터 벗어나서 삶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걸음걸이가 점점 빨라지고 달려가면서 멀어지는 장면을 롱테이크로 촬영했다. 영화적으로 무게를 싣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와타나베 히로코는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있었다. 후지이 이츠키(男). 그는 2년 전 산에 올랐다가 조난을 당해 숨졌고 오늘은 추도식을 맞아 가족친지들이 모이는 날. 식이 끝나고 그의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와서 중학교 앨범을 살피던 중 과거 오타루에서 살던 주소를 발견했다. 지금은 국도가 들어서서 없어진 집이란 얘기를 듣고도 히로코는 이 주소로 편지를 보낸다. 오타루시 제니바코 2-24. 죽은 이에게 보내는 편지는 그 자체로 낭만적이다. 닿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아무 기대 없이 편지를 써서 보냈다.


후지이 이츠키는(女) 히로코가 보낸 편지를 읽고있다. '후지이 이츠키님 잘 지내셨어요? 전 잘 지내요.’ 나중에 이 편지 내용은 클라이맥스에서 다시 한 번 중요하게 다뤄진다. 한국인들 사이에서 많은 패러디를 낳았던 유명한 대사가 여기서 처음 나왔다. "오겡끼데쓰까 와따시와 겡끼데쓰"

女이츠키는 처음부터 감기에 걸려 등장한다. 감기는 그녀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아버지가 감기에 걸려 폐렴으로 악화되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추도식으로 시작해서 마지막 아버지 장례식 장면까지 영화는 전반적으로 죽음의 정서가 도저에 흐른다.

여기서 재미있는 인물 구도를 살펴보자. 히로코가 죽은 옛 연인한테 보낸 편지를 女이츠키가 받았다. 그녀는 중학교 졸업앨범에 나와있듯이 男이츠키와 동창생이다. 이름이 같고 성별이 다른 동명이인. 그런데 女이츠키와 히로코는 얼굴이 똑같다. 정리하자면 중학교 동창생인 두 후지이 이츠키는 이름이 같고 성별이 다르다. 女이츠키와 히로코는 얼굴과 성별이 똑같고 이름이 다르다. 영화 전반부까지는 히로코가 이 인물 구도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한 여정으로 채워지고 그 이후 이야기는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아키바는 아직도 男이츠키를 잊지 못해 그리워하는 히로코를 보며 가슴 아파한다. 사랑하는 그녀가 이제 그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바랐으나 죽은 줄 알았던 이츠키로부터 편지가 오고가는 사실을 알게된다. 히로코는 천국으로 보낸 편지에 답장이 오는 것이 누군가의 장난인 줄 알면서도 내심 기뻐한다. 죽은 옛 연인이 보낸 편지라고 믿고 싶어하는 히로코 때문에 작은 다툼이 벌어지고 아키바는 오타루로 같이 가서 후지이 이츠키가 누군지 찾아보자고 제안했다.


아키바와 함께 오타루로 온 히로코는 옛 연인이 살았던 집으로 찾아갔다. 지금은 국도가 들어서서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린 그의 집. 그녀는 이 주소로 보낸 편지가 어떻게 답장으로 돌아왔는지 여전히 궁금해한다. 사람에게 사는 집이 없어진다는 것은 더이상 돌아올 이유가 없다는 말과 같다. 男이츠키가 멀리 전학을 가고 오타루로 한번 쯤 오고 싶어했어도 삶의 흔적이 완전히 지워진 그곳에 다시 올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병원에서 돌아가신 충격으로 이츠키는 병원에 가는 것을 싫어한다. 그런데 감기가 점점 심해져 본의 아니게 병원을 찾았다가 오래 전 아버지가 병원에 실려온 장면이 떠오르고, 그 순간 과거로 가는 문이 열리면서 男이츠키에 관한 기억이 하나 둘 씩 되살아 난다. 간호사의 호명과 함께 중학교 시절이 교차편집 되는 연출은 강렬하고 몽환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실 아버지의 죽음과 男이츠키는 접점이 있고 이 내용은 영화 종반부에 다뤄진다.


히로코는 편지에 적힌 주소로 찾아갔지만 그 시간 女이츠키는 병원에 가고 집에 없었다. 한동안 기다리면서 그녀 앞으로 편지를 남겼다. 오해가 있었다는 말과 함께 자신은 연인이었던 남자를 찾아왔고 그가 잘 지내는지 궁금하다는 내용을 적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女이츠키와 히로코는 서로 엇갈리고, 돌아나오는 택시 기사로부터 두 사람의 얼굴이 너무 똑같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다음 날 히로코는 얼굴이 너무나 닮아있는 女이츠키와 마주치고 한 눈에 그녀임을 알아본다. 편지를 받을 상대가 바로 눈 앞에 있는데도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 상황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편지에는 중학교 같은 반에 이름과 성이 똑같은 남자애가 있었다는 내용이 쓰여져 있었다. 미스터리가 완전히 풀리고 영화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 전개된다.


무뚝뚝했던 男이츠키가 히로코에게 첫 눈에 반했다며 사귀자고 한 이유는 그녀와 닮았기 때문이었다. 히로코 입장에서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외모가 너무나 비슷해서 선택받은 거라면 사랑에 대한 믿음까지 흔들리는 상황까지 온 것.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男이츠키가 중학교 때 좋아했던 여자와 관련이 있음은 확실해졌다. 옛 연인의 마음을 느낀 히로코는 女이츠키에게 그에 대해 기억나는 게 있으면 얘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女이츠키는 그와 이름에 얽힌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입학식 날부터 친구들의 놀림에 힘들고 속상한 날들이 이어졌다. 1년이면 끝나겠지 했는데 무려 3년이나 같은 반이 됐다. 친구들의 짖궂은 장난 때문에 한 번은 도서부장으로 나란히 뽑혀 같이 일하게 됐었다. 하라는 일은 안하고 빈둥거리는 男이츠키. 그에게는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골라 도서 카드에 자신의 이름을 쓰는 취미가 있었다. 그 이름은 누구의 이름이었을까? 女이츠키가 시립도서관 사서로 일하게 된 것은 이 때의 경험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헤어진 男이츠키와의 인연이 끊어진 듯 보이지만 사실 계속 이어진 것이다.


충격적인 영어점수 때문에 잊을 수 없는 기억도 있다. 27점짜리 기말 영어시험 답안지를 받아들고 고개를 돌려보니까 그는 뒤바뀐 자신의 답안지에 낙서를 하고 있었다. 돌려달라는 말 한 마디를 하지 못해 방과 후 자전거 보관소에서 기다렸다. 딴청을 피우면서 답을 맞춰보는 그를 이츠키는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퉁명스럽게 대했다. 이름이 같아서 의식적으로 피하기는 했지만 사실 두 사람은 서로 좋아하고 있었다. 친구들의 놀림에 때론 곤란을 당하긴 했어도 이 순간만큼은 따뜻한 빛감이 둘을 감싸안으며 아름다운 사춘기 시절의 사랑을 빛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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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 100m 달리기 선수였던 男이츠키는 육상대회 한 달 전 등교길 트럭에 치여 구급차에 실려갔다. 대회 당일, 왼쪽 발 골절상을 입고도 달리다가 넘어졌고 女이츠키는 얼떨결에 그를 카메라에 담는다. 카메라가 女이츠키의 마음을 비유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를 가슴에 품은 것이다. 사춘기 시절 좋아하는 지도 몰랐던 감정이 자리하는 순간을 이런 세련된 연출로 보여준다. 男이츠키의 부상 입은 몸은 헤어짐(사랑의 죽음) 또는 죽음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핵심은 죽은 이의 마음이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다. 그 의지 덕분에 소녀의 마음에 자리잡았고 그의 사랑은 나중에 예쁜 그림으로 그녀의 품에 안긴다. 죽은 이가 세상에 남기고 간 마음이 결국 누군가에게 닿는다는 설정은 낭만적이면서도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히로코는 그가 뛰었던 운동장 사진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활기가 가득했던 운동장은 텅 빈 채 눈이 내리고 땅은 꽁꽁 얼어붙어 있다. 이 장면은 사실상 죽음을 비유한다. 죽음의 기운이 서서히 밀려오면서 이츠키에게 목숨이 오고가는 위기가 곧 닥쳐온다.


女이츠키는 사진을 찍으려고 모교를 찾았다가 도서부 학생들과 마주쳤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이미 후지이 이츠키 도서카드 찾기 놀이가 유행했었는데 그 당사자를 직접 만나고는 놀라면서 반가워했다. 남자 동창생이 장난으로 남긴 카드라고 알려줬지만 아이들은 얼마나 좋아했으면 그랬겠냐며 부러워 난리법석을 떤다.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男이츠키가 남기고 간 마음은 도서실 여기저기에 흩뿌려져 있다. 아직 그 마음이 무엇인지 본인만 모르고 있을 뿐. 사랑하는 마음이 전해질 때의 따뜻한 빛의 색감은 사람의 감정을 흔들어 놓는다.


중3 담임선생님으로부터 男이츠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10년 전 아버지의 죽음이 떠올랐다. “아빠가 돌아가셨구나” 살아있을 때 생생한 모습 그대로 얼어죽어있는 잠자리를 보고 그녀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실감했었다. 죽은 사람은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남은 이들의 기억 속에는 생생한 모습으로 남아있다는 의미를 상징적인 연출로 인상깊게 담아낸다. 인간은 누군가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한다. 그러나 망자의 흔적은 삶의 어딘가에 남아서 우리는 영향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상흔이 무뎌지기는 하겠지만...


이츠키는 감기가 악화되어 고열에 시달리다 쓰러졌다. 급히 병원에 가야 했으나 폭설 때문에 구급차는 발이 묶이고 택시가 안잡히면 걸어가기로 결정한다. 이츠키 아버지가 10년 전 똑같은 상황에서 병원으로 업혀 갔다가 죽은 까닭에 이츠키의 엄마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아버님을 믿고 따르기로 한다. 목숨과 바꿔서라도 손녀를 살리고자 하는 할아버지의 절박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하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지인 작가, 평론가
destiny213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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