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 〈러브레터〉 이해와 감상 - 상편
2018. 12. 18. 18:16
장면에 대한 언급 없이 영화의 이해와 감상을 논하는 것은 허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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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눈을 감고 숨을 참은 채 하얀 설원 위에 누워있다. 이윽고 눈을 떠 숨을 터트리고 깨끗한 눈밭에 발자국을 남기며 성큼성큼 걸어나간다. 첫 장면은 사실상 유사죽음과 같다. 이 영화는 와타나베 히로코가 죽음으로부터 벗어나서 삶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걸음걸이가 점점 빨라지고 달려가면서 멀어지는 장면을 롱테이크로 촬영했다. 영화적으로 무게를 싣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와타나베 히로코는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있었다. 후지이 이츠키(男). 그는 2년 전 산에 올랐다가 조난을 당해 숨졌고 오늘은 추도식을 맞아 가족친지들이 모이는 날. 식이 끝나고 그의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와서 중학교 앨범을 살피던 중 과거 오타루에서 살던 주소를 발견했다. 지금은 국도가 들어서서 없어진 집이란 얘기를 듣고도 히로코는 이 주소로 편지를 보낸다. 오타루시 제니바코 2-24. 죽은 이에게 보내는 편지는 그 자체로 낭만적이다. 닿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아무 기대 없이 편지를 써서 보냈다.
후지이 이츠키는(女) 히로코가 보낸 편지를 읽고있다. '후지이 이츠키님 잘 지내셨어요? 전 잘 지내요.’ 나중에 이 편지 내용은 클라이맥스에서 다시 한 번 중요하게 다뤄진다. 한국인들 사이에서 많은 패러디를 낳았던 유명한 대사가 여기서 처음 나왔다. "오겡끼데쓰까 와따시와 겡끼데쓰"
女이츠키는 처음부터 감기에 걸려 등장한다. 감기는 그녀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아버지가 감기에 걸려 폐렴으로 악화되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추도식으로 시작해서 마지막 아버지 장례식 장면까지 영화는 전반적으로 죽음의 정서가 도저에 흐른다.
여기서 재미있는 인물 구도를 살펴보자. 히로코가 죽은 옛 연인한테 보낸 편지를 女이츠키가 받았다. 그녀는 중학교 졸업앨범에 나와있듯이 男이츠키와 동창생이다. 이름이 같고 성별이 다른 동명이인. 그런데 女이츠키와 히로코는 얼굴이 똑같다. 정리하자면 중학교 동창생인 두 후지이 이츠키는 이름이 같고 성별이 다르다. 女이츠키와 히로코는 얼굴과 성별이 똑같고 이름이 다르다. 영화 전반부까지는 히로코가 이 인물 구도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한 여정으로 채워지고 그 이후 이야기는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아키바는 아직도 男이츠키를 잊지 못해 그리워하는 히로코를 보며 가슴 아파한다. 사랑하는 그녀가 이제 그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바랐으나 죽은 줄 알았던 이츠키로부터 편지가 오고가는 사실을 알게된다. 히로코는 천국으로 보낸 편지에 답장이 오는 것이 누군가의 장난인 줄 알면서도 내심 기뻐한다. 죽은 옛 연인이 보낸 편지라고 믿고 싶어하는 히로코 때문에 작은 다툼이 벌어지고 아키바는 오타루로 같이 가서 후지이 이츠키가 누군지 찾아보자고 제안했다.
아키바와 함께 오타루로 온 히로코는 옛 연인이 살았던 집으로 찾아갔다. 지금은 국도가 들어서서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린 그의 집. 그녀는 이 주소로 보낸 편지가 어떻게 답장으로 돌아왔는지 여전히 궁금해한다. 사람에게 사는 집이 없어진다는 것은 더이상 돌아올 이유가 없다는 말과 같다. 男이츠키가 멀리 전학을 가고 오타루로 한번 쯤 오고 싶어했어도 삶의 흔적이 완전히 지워진 그곳에 다시 올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병원에서 돌아가신 충격으로 이츠키는 병원에 가는 것을 싫어한다. 그런데 감기가 점점 심해져 본의 아니게 병원을 찾았다가 오래 전 아버지가 병원에 실려온 장면이 떠오르고, 그 순간 과거로 가는 문이 열리면서 男이츠키에 관한 기억이 하나 둘 씩 되살아 난다. 간호사의 호명과 함께 중학교 시절이 교차편집 되는 연출은 강렬하고 몽환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실 아버지의 죽음과 男이츠키는 접점이 있고 이 내용은 영화 종반부에 다뤄진다.
히로코는 편지에 적힌 주소로 찾아갔지만 그 시간 女이츠키는 병원에 가고 집에 없었다. 한동안 기다리면서 그녀 앞으로 편지를 남겼다. 오해가 있었다는 말과 함께 자신은 연인이었던 남자를 찾아왔고 그가 잘 지내는지 궁금하다는 내용을 적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女이츠키와 히로코는 서로 엇갈리고, 돌아나오는 택시 기사로부터 두 사람의 얼굴이 너무 똑같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다음 날 히로코는 얼굴이 너무나 닮아있는 女이츠키와 마주치고 한 눈에 그녀임을 알아본다. 편지를 받을 상대가 바로 눈 앞에 있는데도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 상황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편지에는 중학교 같은 반에 이름과 성이 똑같은 남자애가 있었다는 내용이 쓰여져 있었다. 미스터리가 완전히 풀리고 영화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 전개된다.
무뚝뚝했던 男이츠키가 히로코에게 첫 눈에 반했다며 사귀자고 한 이유는 그녀와 닮았기 때문이었다. 히로코 입장에서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외모가 너무나 비슷해서 선택받은 거라면 사랑에 대한 믿음까지 흔들리는 상황까지 온 것.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男이츠키가 중학교 때 좋아했던 여자와 관련이 있음은 확실해졌다. 옛 연인의 마음을 느낀 히로코는 女이츠키에게 그에 대해 기억나는 게 있으면 얘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女이츠키는 그와 이름에 얽힌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입학식 날부터 친구들의 놀림에 힘들고 속상한 날들이 이어졌다. 1년이면 끝나겠지 했는데 무려 3년이나 같은 반이 됐다. 친구들의 짖궂은 장난 때문에 한 번은 도서부장으로 나란히 뽑혀 같이 일하게 됐었다. 하라는 일은 안하고 빈둥거리는 男이츠키. 그에게는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골라 도서 카드에 자신의 이름을 쓰는 취미가 있었다. 그 이름은 누구의 이름이었을까? 女이츠키가 시립도서관 사서로 일하게 된 것은 이 때의 경험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헤어진 男이츠키와의 인연이 끊어진 듯 보이지만 사실 계속 이어진 것이다.
충격적인 영어점수 때문에 잊을 수 없는 기억도 있다. 27점짜리 기말 영어시험 답안지를 받아들고 고개를 돌려보니까 그는 뒤바뀐 자신의 답안지에 낙서를 하고 있었다. 돌려달라는 말 한 마디를 하지 못해 방과 후 자전거 보관소에서 기다렸다. 딴청을 피우면서 답을 맞춰보는 그를 이츠키는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퉁명스럽게 대했다. 이름이 같아서 의식적으로 피하기는 했지만 사실 두 사람은 서로 좋아하고 있었다. 친구들의 놀림에 때론 곤란을 당하긴 했어도 이 순간만큼은 따뜻한 빛감이 둘을 감싸안으며 아름다운 사춘기 시절의 사랑을 빛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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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 100m 달리기 선수였던 男이츠키는 육상대회 한 달 전 등교길 트럭에 치여 구급차에 실려갔다. 대회 당일, 왼쪽 발 골절상을 입고도 달리다가 넘어졌고 女이츠키는 얼떨결에 그를 카메라에 담는다. 카메라가 女이츠키의 마음을 비유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를 가슴에 품은 것이다. 사춘기 시절 좋아하는 지도 몰랐던 감정이 자리하는 순간을 이런 세련된 연출로 보여준다. 男이츠키의 부상 입은 몸은 헤어짐(사랑의 죽음) 또는 죽음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핵심은 죽은 이의 마음이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다. 그 의지 덕분에 소녀의 마음에 자리잡았고 그의 사랑은 나중에 예쁜 그림으로 그녀의 품에 안긴다. 죽은 이가 세상에 남기고 간 마음이 결국 누군가에게 닿는다는 설정은 낭만적이면서도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히로코는 그가 뛰었던 운동장 사진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활기가 가득했던 운동장은 텅 빈 채 눈이 내리고 땅은 꽁꽁 얼어붙어 있다. 이 장면은 사실상 죽음을 비유한다. 죽음의 기운이 서서히 밀려오면서 이츠키에게 목숨이 오고가는 위기가 곧 닥쳐온다.
女이츠키는 사진을 찍으려고 모교를 찾았다가 도서부 학생들과 마주쳤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이미 후지이 이츠키 도서카드 찾기 놀이가 유행했었는데 그 당사자를 직접 만나고는 놀라면서 반가워했다. 남자 동창생이 장난으로 남긴 카드라고 알려줬지만 아이들은 얼마나 좋아했으면 그랬겠냐며 부러워 난리법석을 떤다.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男이츠키가 남기고 간 마음은 도서실 여기저기에 흩뿌려져 있다. 아직 그 마음이 무엇인지 본인만 모르고 있을 뿐. 사랑하는 마음이 전해질 때의 따뜻한 빛의 색감은 사람의 감정을 흔들어 놓는다.
중3 담임선생님으로부터 男이츠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10년 전 아버지의 죽음이 떠올랐다. “아빠가 돌아가셨구나” 살아있을 때 생생한 모습 그대로 얼어죽어있는 잠자리를 보고 그녀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실감했었다. 죽은 사람은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남은 이들의 기억 속에는 생생한 모습으로 남아있다는 의미를 상징적인 연출로 인상깊게 담아낸다. 인간은 누군가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한다. 그러나 망자의 흔적은 삶의 어딘가에 남아서 우리는 영향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상흔이 무뎌지기는 하겠지만...
이츠키는 감기가 악화되어 고열에 시달리다 쓰러졌다. 급히 병원에 가야 했으나 폭설 때문에 구급차는 발이 묶이고 택시가 안잡히면 걸어가기로 결정한다. 이츠키 아버지가 10년 전 똑같은 상황에서 병원으로 업혀 갔다가 죽은 까닭에 이츠키의 엄마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아버님을 믿고 따르기로 한다. 목숨과 바꿔서라도 손녀를 살리고자 하는 할아버지의 절박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하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지인 작가, 평론가
destiny213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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