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 〈그래비티〉 이해와 감상 - 중편
어둡고 광활한 우주에 홀로 내 던져진 인간은 공포를 경험한다. “누구든, 아무라도 듣고있나요? 제발 들어줘요.” 맷과의 통신마저 끊어지고 먼저 교신을 시도하는 이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사람들과 소통이 싫어서 지구를 떠난 라이언이 죽음에 직면한 순간 생존을 위해 다른이를 찾는다는 설정은 굉장히 역설적이다. 삶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든 관계를 맺고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익스플로러호 내부를 수색해 동료들의 시신을 목도한 두 사람은 그들이 유일한 생존자임을 확인하게 된다. 삶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끊어진 휴스턴과의 교신을 계속 시도한다. 소유즈를 타고 지구로 귀환하기 위해 국제우주정거장(ISS)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두 사람은 한 몸처럼 연결되어 있지만 언제 끊어질 지 모르는 위태함이 상존한다. 우주를 유영하며 아름다운 일출을 감상하고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눈다.
라이언한테는 4살 된 딸 '새라'가 있었다. 딸은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다가 넘어서져 머리를 부딪혔고 그렇게 허망하게 사랑스러운 딸을 잃었다. 그 이후로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무의미한 쳇바퀴같은 인생을 살아왔다. 딸의 죽음 이후 라이언 주위는 이런저런 소문들로 매우 시끄러웠다. 대단한 일도 아닌, 아이들이 놀면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죽었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말들이 많았다. 위로의 말조차 듣기 싫었다. 견디기 힘든 시간이 이어졌다. 말소리가 싫어서 라디오를 들을 때도 조용한 것들로만 골라 들었다. 사람과 인간세상이 싫어서 우주로 나왔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지구를 떠나 고요한 우주가 차라리 좋았다.
그녀는 매우 외로운 사람이다. 이혼했는지 사별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남편도 없고 딸도 없다. 지구의 그 어느 누구도 위를 올려다보며 그녀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없다. 스스로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혼자 살아가리라 마음먹었지만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 다른이의 도움(관계)은 절실해진다.
두 사람을 연결해주는 줄은 ISS에 접근하는 속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어딘가에 걸려 끊어져버렸다. 소유즈는 외관손상을 입어 낙하산이 펼쳐져 있고 지구 재진입용으로 사용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다. 서로를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라이언은 느슨한 낙하산 줄에 의지해 자칫하면 두 사람 다 죽을 운명에 처한다. 라이언이 맷을 잡아당기는 순간 반작용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에 줄이 끊어질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맷은 라이언의 목숨이라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줄을 놓는 선택을 한다. “자넨 할 수 있어 라이언”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남기고 그는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지구와의 교신도 끊어지고 유일하게 의지했던 동료마저 떠나 보내고 그녀는 그렇게 홀로 덩그러니 남겨졌다. 모든 관계가 끊어지고 적막한 우주공간에 홀로 고립된 인간은 공포를 경험한다.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광활한 우주에서 이제 오직 삶을 향한 의지만이 그녀를 채찍질 할 것이다.
맷은 통신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그녀를 독려하며 정거장 안으로 인도했다. 갠지스 강 위에 걸린 해가 놀랍도록 아름답다는 말을 남기고 그는 어두운 우주공간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산소가 없어 호흡이 곤란해진 상황에서도 그의 격려에 힘입어 내부 진입에 성공한 라이언은 잠시 기진맥진하여 쓰러진다.
삶과 죽음은 작용과 반작용의 관계와 같다. 누군가의 죽음과 희생은 다른 생명의 재탄생으로 이어진다. 태아가 엄마의 자궁 속에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상징적 연출은 인간으로 하여금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정신을 차리고 맷과 교신을 시도해봤지만 그는 응답이 없다. 시끄러워서 듣기 싫었던 그의 수다가 그리워지는 아이러니가 안타까움과 슬픔을 배가시킨다. 그녀는 동료를 모두 잃고 외롭게 홀로 우주에 남겨졌다. 휴스턴과의 연결이 끊어진 상황에서도 역동하는 지구를 내려다 보며 자신이 유일한 생존자임을 보고한다.
ISS와 분리된 소유즈가 낙하산 줄에 걸려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우주 파편의 습격도 잘 견뎌냈건만 결정적인 순간 연료 분사 버튼이 작동하지 않았다. 저 멀리 삶의 유일한 희망인 선저우가 보이는데 이대로 포기해야 되는 것인가. 삶의 끈을 놓지 않은 필사의 노력이 절망으로 다가오자 몸부림 치며 격정적 외침을 토해낸다. 기도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본의 아닌 상황을 바꾸는 것은 삶을 향한 강한 의지와 행동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어떻게든 해결책을 모색해서 삶으로 나아가거나 선택은 두 가지 뿐이다.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계속 지구와 교신을 시도하는 것은 그녀가 순간 삶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여도 아직 여전히 삶의 희망을 놓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나중에 꿈에서 맷을 만나는 장면으로 구체화된다. 교신은 성공했지만 라디오 너머의 그 누군가와는 언어가 달라서 소통하지 못한다. 멀리서 들리는개짖는 소리를 흉내내는 그녀의 목소리는 죽음을 앞둔 인간의 울부짖음처럼 느껴져 너무 슬프게 다가온다. “날 위해 슬퍼해 줄래요? 절 위해 기도해주실래요? 너무 늦었나요?” 죽음의 공포에 직면하여 인간이 관계의 소중함을 비로소 깨닫는 순간은 매우 역설적이다. 곧 죽은 딸을 볼 수 있다는 체념은 이대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더해 준다.
죽은 줄 알았던 맷이 돌아와 문을 두드린다. 문을 여는 순간 내부 공기가 모두 빠져나가며 이어지는 38초 간의 정적은 영화적 연출의 마법같은 장면이다. 실제로는 문을 여는 순간 죽고 말지만 꿈이라는 장치를 활용하여 논리를 파괴하고 허점을 매끈하게 피해간다. 〈그래비티〉가 굉장히 시(詩)적인 이유는 시처럼 형식과 논리와 언어의 파괴를 통해 장르적 관습 탈피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기존 SF영화의 화려한 액션활극과는 결이 다를 뿐만아니라 이처럼 소리가 사라지는 마법같은 연출은 〈그래비티〉의 영화적 가치가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마치 영화의 문법을 파괴하는 듯한 이렇게 강렬하고 인상적인 정적은 처음 봤다. 상영 사고가 벌어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지만 사실은 치밀하게 의도된 영화적 화법이다. 'Life in space is impossible' 우주에서의 삶(생존)은 불가능하다.
또한 〈그래비티〉는 과학적 상징과 비유를 풍부하게 담고있고 이야기의 빈공간이 많아 관객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시적이다. 라이언이 왜 우주에 왔고 딸의 죽음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우주에서의 깨달음과 지구로의 귀환이 함의하는 바는 무엇인지 관객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라이언이 삶을 포기하려고 하는 순간 공기는 모두 빠져나가 버린다. 공기가 없으면 숨을 쉴 수도 사람과 소통할 수도 없다. 비록 꿈의 환상이지만 그가 공기를 채워줌으로써 두 사람은 다시 연결되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준다. 그는 연착륙 제트엔진 사용을 일러두고 삶의 용기를 북돋워 줬다. “지구로 돌아갈거야 아님 여기서 계속 살거야? 자식을 먼저 잃은 것보다 큰 슬픔은 없어. 가기로 결정했으면 계속 가야해. 땅에 두 발로 딱 버티고 서서 살아가는거야.” 삶이 불가능한 세계를 벗어나 지구로 돌아가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슬픔을 극복하며 살아가야 한다.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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