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 〈그래비티〉 이해와 감상 - 하편

고도를 잃고 대기권으로 추락하는 티엔궁(중국우주정거장)에 무사히 도착했다. 탈출선 선저우에 탑승 후 교신이 끊어진 휴스턴과의 대화를 계속 시도한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에도 공간을 진동하는 목소리는 삶에 대한 간절함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내가 보기에 결과는 둘 중 하나다. 멋진 여행을 다녀왔다고 자랑하든지 아니면 10분 안에 불타 죽든지. 어찌됐건… 어찌돼든, 밑져야 본전이니까! 왜냐면 어느 쪽이든 엄청난 여행이 될테니까.”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이어져있다는 인식의 확장으로 나아간다. 사람들을 만나 자랑하거나 만약 죽으면 그리운 딸을 볼 수 있다는, 어느 쪽으로든 멋진 여행이 될거라고 둘을 잇는다. 태어나자마자 사망선고를 받은 인간은 평생 죽음을 산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삶과 죽음은 닿아있고 죽음은 또다른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철학적 차원에 도달한 인간의 깨달음은 수많은 관객의 마음을 동시에 뒤흔든다. 돌아가서 멋진 모험담을 자랑한다는 것은 귀환 자체가 상대방과의 대화와 소통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지구와 사람이 싫어서 떠났지만 가혹한 우주를 경험하고 그 모든 관계의 소중함을 알게됐다. 한 인간의 내적 성장담을 영화는 깊이있는 화법으로 담담하게 그려낸다.

티엔궁에서 분리된 선저우(탈출선)는 맹렬한 속도로 지구 대기권을 향해 날아간다. 불타 죽을 것인가 삶을 이어나갈 것인가, 라이언의 운명은 그 짧은 몇 분 동안에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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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박이 내릴 때 크기와 무게에 상관없이 같은 속도로 땅에 떨어지듯이 대기권으로 진입하는 우주 파편들도 같은 중력가속도의 힘을 받아 속도는 일정하다. 이 장면에서는 크기와 모양이 각기 다른 잔해들이 속도가 서로 달라서 이리저리 부딪히고 선저우에 타격을 입히는데 이것은 극적 장면 연출을 위한 영화적 허용으로 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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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은 어느 호수에 무사히 착륙하여 물에 가라앉은 탈출선을 빠져나와 세상으로 나온다. 이것은 자궁 속의 아기가 양수를 뚫고 탄생하는 것과 사실상 같은 의미이며 호숫가에 이르러 네 발로 기어가다 두 발로 딛고 일어서서 걸어가는 모습은 인간의 성장과정과 궤를 같이한다. 다르게 생각하면 탁한 물에서 탄생한 생명이 양서류(개구리)의 진화를 거쳐 뭍으로 나오는 생명의 진화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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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했던 우주와 달리 지구는 벌레소리 새소리 물결치는 생명의 소리로 가득하다. 라이언은 땅에 이르러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고 물과 흙과 공기와 함께 주어진 또다른 삶에 감사한다. 중력을 이겨내고 일어서려는 순간 쓰러지고 마는데 다시 일어서서 한걸음씩 성큼성큼 나아가는 엔딩 장면은 굉장히 인상적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 부터 중력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중력은 저마다 지고있는 삶의 무게와 같다. 그 짐이 힘겨워 때론 넘어질 지라도 살아가고자 한다면 버티고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를 상징적인 연출로 보여준다. 마지막 엔딩 시퀀스의 미학적 성취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탁월하다. 화려한 우주액션을 기대했던 분들께는 실망스러운 작품이었을 지도 모르겠으나 영화가 담고있는 철학적 깊이를 음미할 수 있었던 관객들한테는 전율과 감동을 느낄 수 있었던 명작으로 기억될 것이다.



Thank You, Ryan ! Let’s go !
평 론

〈그래비티〉는 2014년 제8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SF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감독상, 촬영상 등 7관왕을 달성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오랜 친구인 엠마누엘 루베츠키 촬영감독과 환상적인 호흡을 선보이며 예술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영화사(映畵史)의 기념비적 수작을 만들어냈다. 특히 오프닝 시퀀스에서 펼쳐지는 12분간의 환상적인 롱테이크 카메라 워크는 우주를 체험하는 영화의 진수를 보여줬다. 〈그래비티〉는 전반적으로 사실감과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이런 촬영방식을 자주 활용한다. 영화 속 인물이 경험하는 시간과 관객이 영화를 관람하는 시간의 격차를 좁혀 체험하는 영화를 구현하기 위한 목표를 높은 수준의 완성도로 달성해냈다.

〈그래비티〉는 공간(사회,세계)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다룬다. 라이언은 딸의 죽음 이후 복잡하고 시끄러운 지구를 떠나 우주로 나왔다. 고요하고 광활한 우주가 탁 트인 해방감을 주기도 하지만 그곳은 삶을 영위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공간이다. 공기가 없어 소통도 불가능하고 기압도 산소도 없다. 우주에서의 삶은 불가능하다. 라이언은 지구와 동료들과의 관계가 모두 끊어져 홀로 고립된 무중력의 공간에서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재난인지 깨닫는다. 삶을 향한 의지를 불태우며 그 모든 관계 회복과 소통의 의미를 담아 지구로 귀환하는 이야기는 서사적으로도 매우 잘 짜여져 있다. 자연재난 처럼 묘사되는 우주사고를 겪은 후 내적 아픔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인간의 이야기를 영화적으로 멋지고 아름답게 그려냈다.

〈그래비티〉는 삶과 죽음의 문제도 철학적으로 깊게 고찰하고 있다. 누군가의 죽음은 다른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지고 삶과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닿아있다는 통찰은 인간으로 하여금 숙연한 정서를 불러 일으킨다. 감독 자신이 밝힌 것처럼 영화에는 생명과 관련된 과학적 상징과 비유가 풍부하게 들어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런 상징들은 삶과 죽음의 관계와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래비티〉는 인간들이 사는 세상과 ‘나’의 관계를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게다가 생명의 역사를 압축하여 영화적으로 아름답게 녹여낸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신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러가지 면에서 이 영화는 SF장르를 넘어 영화사(映畵史)에서 다시 보기 힘든 탁월한 작품임에 틀림 없다.
지인 작가, 평론가
destiny213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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