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리뷰

[리뷰]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1회 - 첫 만남 -

어린지인 2018. 6. 22. 17:43

드라마 종영 후 리뷰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부분은 모여 전체를 이루고 그 맥락 속에서 부분은 살아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근차근 다시 보다보면 처음에는 미처 깨닫지 못한 것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신문기사에서 우연히 안판석 감독님께서 새 드라마를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캐스팅된 배우는 손예진, 정해인. 남자 배우는 누군지 몰랐고 손예진은 12년이 지난 지금에도 인생드라마 1위에 올라있는 '연애시대'의 여주인공이다. 그리고 '하얀거탑' '밀회'를 연출하신 감독님 작품이라 믿고 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문기사를 일찍 접하고 1회부터 볼 수 있었던 나는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제작발표회도 챙겨봤고 감독님이 어떤 의도로 드라마를 만들고 있는가에 대해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상투적인 멜로가 아닌 진짜 현실연애를 다루면서 시청자들과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다면 드라마는 성공한 것이라고 한 인터뷰가 인상에 남는다. 시청률에 연연하지 않고 내달리되 10년 20년 후에도 사랑받을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다고 한 감독님을 보면서 존경심이 생겼다.
난 안판석 감독님의 연출 스타일을 사랑한다. 빈공간이 많아 때론 어렵고 불친절해서 관객들의 외면을 받기도 하지만 상상력을 자극하는 독특한 연출 스타일 덕에 내가 살아있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혹자는 텔레비젼을 '바보상자'라고 욕하지만 이 드라마를 두고는 감히 그런 평가를 내릴 수 없다. 마치 소설책 읽듯이 생각하고 곱씹으며 여러 번 읽을 때마다 그윽한 향기가 퍼지는 드라마를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리뷰를 쓰는 것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나를 위한 것이다. 완전히 현실세계의 인물처럼 살아 움직였던 진아와 준희를 한번 쯤 정리하고 객관화해야 비로소 나는 그들과 쿨하게 헤어질 수 있다.


진아는 드라마가 시작하자마자 남자친구한테 차인다. "우리 사이가 곤약 같애" 말 한마디와 함께. 진아는 남자보는 눈이 없어서 그렇게 매번 차이고 다닌다.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들이 사랑이 아니었고 진짜 사랑은 안해봤으니까. 연애도 맘대로 안되고 일에 치이고 무기력한 일상이 반복되던 어느 날 준희가 짠하고 나타났다. 3년 간의 미국지사 파견을 마치고 본사의 호출로 돌아오게 된 것.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기대고 싶던 딱 그순간 자꾸만 웃음짓게 만드는 준희한테 저도 모르게 감정이 뻗어나간다.

회사일에 지친 진아를 달래주며 준희는 "금기를 넘어서야 프로지" 라는 말을 한다. 금기를 넘어서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나는 짐작했다. 금기를 넘어선 두 사람의 사랑이 어떤 대가를 치르고 어떻게 이별하는지 드라마는 그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나간다.

누나한테 밥 사달라는 준희. 동생처럼 밥 사달라고 졸라대는 건 연인이 되기 전이니까 가능하다. 진아는 외근이 많아서 시간 맞추기 힘들다며 이렇게 말한다. "계속 찔러봐. 시간 맞아 떨어지는 날 있으면 니가 원하는건 뭐든 쏠께." 소름돋는 대사다. 나는 이 대사를 "나 지치고 힘든데 계속 찔러봐. 타이밍이 맞아 떨어지면 니가 원하는대로 뭐든 할게" 라고 들었다.

연인한테 배신 당하고 상처입어 울고 있는 진아. 준희는 그저 지켜보고 자리를 피해주는 것 밖엔 해줄게 없다. 진아가 당면하는 문제들이 늘 그렇다. 회사 일이든 가족 문제든 본인이 해결해야 할 몫이지 이를 준희한테 넘기는 순간 짐이 되고 만다. 준희가 대신해 줄 수 없는 그러한 것들이다. 그래서 진아는 준희가 늘 그자리에 있어주길 바랐다. 힘들어도 같이 견디며 이겨나가주길 원했다. OST 'Stand by your Man' 번역하면 '그 사람 곁에서 힘이 되어 주세요' (여기서 Man은 성을 구분하는 개념이 아닌 일반 사람을 의미한다.)

울다 지쳐 곤히 잠든 진아. 이런 진아를 준희는 마음에 담는다.(준희의 카메라에 진아가 찍혀 들어왔다 !!!) 느닷없이 준희의 마음에 들어간 진아는 놀라 당황하고 준희는 이 상황을 은근히 즐긴다. 이때부터 오해하고 질투하고 설레는 썸남썸녀의 모습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긴다.

내가 가장 애정하는 엘리베이터 씬이다. 두 사람의 감정이 깊어질수록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머뭇거리는 정도가 강해진다. 진아네 아파트 엘리베이터 씬은 어림잡아 10번 이상 등장하고 회사 건물 1층은, 엘리베이터 앞은 출근길 만남의 장소로 매번 애용된다. 심지어 진아와 준희가 연애할 때 노는 장소나 들르는 가게도 거의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일상은 특별한 일 없이 지루하게 반복되는 그 무엇이다. 그러다가 불쑥 새로운 사랑이 일상으로 파고들어 균열을 만들고 반복되는 일상에 지루할 틈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어른들은 연애를 하는 것이다. 일상의 균열이 때로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사람은 그러한 변화를 견디고 받아들이는 만큼 성장한다. 그래서 나는 이 드라마가 가지는 '일상성'을 매우 사랑한다.

밥 사달라고 해놓고는 오히려 밥을 사는 준희. 준희한테 진아는 더이상 누나가 아니라 여자다. 본인 역시 밥 사달라 조르는 동생이 아니라 남자가 되고싶다. 맛있게 밥 잘 먹었다는 진아에게 준희가 한마디 툭 던진다. "맛을 봤으니 윤진아 이제 큰일났다" 소름돋는 대사가 아닐 수 없다. 금기를 넘어 사랑에 빠지고 진짜 큰일이 벌어진다. 사랑은 달콤했지만 상처는 너무나 컸다. 진짜 사랑이 뭔지 모르는 진아에게 준희는 진짜 사랑을 가르쳐주고 떠나버렸다.

1회의 모든 부분을 통틀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장면이다. 나는 이 드라마가 인생드라마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준희에게 진아는 특별히 꾸미지 않는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 예쁘게 차려입거나 화장하지 않아도 그저 진아가 좋다. 실제 진아는 준희 앞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행동하며 제일 사랑스럽다. 다른 남자들 앞에서는 격식있게 차려입고 예쁘게 꾸미고 나가도 부자연스럽게 행동한다. 아무리 외모를 예쁘게 치장해도 남자들은 그 화장 속에 가려진 진짜 진아를 보려고도 사랑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매번 차이는 것. 그러나 준희는 다르다.
늦은 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꾸밈없이 자신을 드러내놓고 자유를 만끽하는 진아가 사랑스럽다. 그걸 흐뭇하게 바라보는 준희. 내가 어찌 이 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지인 작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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