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평론
영화평론 〈곡성〉 이해와 감상 - 상편
어린지인
2019. 3. 12. 17:05
장면에 대한 언급 없이 영화의 이해와 감상을 논하는 것은 허구라고 생각합니다.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들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누가 복음 24장 37-39절
정체를 모르는 인간이 낚시질을 하고 있다. 미끼를 덥썩 물어 낚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미끼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어느새 허우적 대고 있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 밖을 나서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얼얼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재구성하게 만드는 〈곡성〉은 그런 영화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괴질이 마을을 습격한다. 심각한 피부병과 함께 정신질환을 동반하고 끔직한 죽음을 불러 일으키는 병이 마을 전체에 서서히 퍼지고 점점 종구의 가족을 향해 과녁을 좁혀온다. 딸이 병에 걸리자 종구는 지금 벌어지는 상황이 정확히 뭔지 어떤 의미인지 모르면서도 갈팡질팡 죽기살기로 뛰어다닌다.
끔찍한 살인이 벌어진 현장에서 종구는 해골모양으로 말라 비틀어진 ‘금어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홀린듯 손을 뻗어 만지려고 한다. 집안에 죽음을 내리는 의미로 사용되는 ‘금어초’는 영화 종반부에 종구가 대문에 쳐놓은 금줄을 넘어갈 때 순식간에 말라 비틀어지면서 섬뜩함을 더해준다.
오성복은(동료경찰) 이 모든 일들이 그 일본인이(외지인) 오고나서 생긴 일들이라고 말한다. 종구는 독버섯을 먹고 생긴 일이라는 경찰 발표를 믿는 듯하다가 그럴리가 없다는 동료의 말에 ‘의심’쪽으로 서서히 마음이 기운다. “요렇게 소문이 파다하면 말여 무신 이유가 있는거여 이유가.” 사실 마을에 내린 재앙과 일본인 사이에는 심증만 있을 뿐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이해가 안되는 상황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끊임없이 시도하는 존재이다. 마음에 의심이 내려앉은 그 순간 갑자기 벼락이 치면서 전기가 나간다. 그 때 머리를 풀어헤친 채 나체로 서있는 여자를 목격하면서 두 사람은 기겁한다.
이때부터 종구는 악몽에 시달리고 집안에 재앙이 시작된다. 의심이 마음에 자리잡자마자 시작된 불행. 이 영화는 믿음의 문제를 건드린다. 이 시점에 사실상 효진이 일본인한테 어떤 식으로든 범해졌다고 봐야한다. 그런 추측을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효진은 부모의 성관계 장면을 목격하고도 놀라거나 피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문을 열고 차 안으로 불쑥 들어오려고 하는데 이는 성적 상상을 자극한다. 머쓱한 종구는 딸을 데리고 나가 문구점에서 머리핀을 비롯한 갖가지 물건들을 잔뜩 사준다. 그 다음 이어지는 장면이 재밌다.
종구는 딸한테 넌지시 묻는다. “언제부터 봤냐? 응? 어디까지 봤는디?” “걱정말어. 암말 안할랑께” “봤네. 다봤네” “걱정말라고 첨본 것도 아니여.” ??!!! 효진한테는 이 순간 이미 성관계가 낯선게 아니라 익숙한 것으로 그려진다. 실제로 많이 봐와서 그랬을 수도 있고 이미 일본인한테 범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후자 쪽에 무게를 싣는 입장이다. 딸이 모든걸 다 봐버렸다고 고개를 푹 숙이는 종구. 그런 아빠한테 효진은 “괜차네 먹어”하며 음료를 내미는 상황에서 어른과 아이 역할은 완전히 뒤집힌다. 즉 효진이 어른같고 종구가 아이같다는 것. 다시말해 효진은 어른 입장에서 성관계는 익숙한 거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강 맞은 편에 앉아 낚시하는 일본인을 롱쇼트로 보여준다. 예사롭지 않은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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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두 번째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집은 불타버린 채 유력한 용의자였던 안주인은(아주머니) 목이 매달려 죽은 시체로 발견됐다. ‘무명'은(천우희) 마치 범행을 옆에서 목격한 듯 종구한테 자세하게 설명을 늘어놓는다. 그러다가 대뜸 그 왜놈이 귀신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사라져버렸다. 왜놈에 대한 의심은 이제 확신으로 굳어졌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그 왜놈이다.' 그 순간 동물의 사체를 뜯어먹고 있는 악마같은 형상의 왜놈과 맞닥뜨리게 된다.
여기서 ‘무명’은(천우희) 대체 누구인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무명(無名)'은 말 그대로 이름이 없는 무엇이다. 어떤 대상이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정체성을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초월적 존재이므로 이름이 없는 것이다. 그녀는 마을과 인간 세상을 굽어 살피는 초자연적 신으로서 일종의 수호신이다. 초월적 존재로서 영화에 직접 등장하는 횟수는 적은 편이다. 하지만 영화에 공백이 있어도 우리가 그녀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지 않는 것은 초월적 시선으로 자연을 내려다 보거나 마을을 살피는 시점쇼트로 사실상 대체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렇게 언제나 존재감을 드러낸다.
악몽의 강도가 점점 세지고 딸까지 아파서 몸져눕게 되자 종구는 일본인에 대한 소문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건강원을 찾아간다. 건강원 주인은 산 속에서 일본인이 고라니를 생으로 뜯어먹고 있었다는 목격담을 들려준다. 종구는 말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증거 있냐고 묻는다. 그러자 증거라며 텅 빈 냉장고를 보여주는데 이 장면이 예사롭지 않다. ‘카오스(chaos)’는 의성어에서 온 말이다. 하품을 하면서 ‘카오스’라고 발음해보자. 입이 넓어지면서 속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 텅 빈 공간을 의미하는 카오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태초의 모든 것의 시작으로 설명한다. 건강원 주인은 일본인이 사람이 아니라며 눈으로 직접 본 것을 증언하고 텅 빈 공간을 증거로 제시한다. 코스모스(질서)에 대응하는 카오스(무질서)로서 일본인의 정체를 설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종구는 건강원 주인의 증언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함께 일본인 집을 찾아나선다. 일본인이 고라니를 생으로 뜯어먹었던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뒤 세 사람은 공포에 질리고 그 때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건강원 주인은 겁에 질려 돌아가려 하자 종구와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고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흙 범벅이 된 몸을 일으켜 산으로 내려가려고 하는 순간 그는 벼락을 맞고 다시 쓰러진다. 몸소 하려고 했던 증언을 회피하고 도망치려고 하자 자연신인 무명이 천벌을 내린 것으로 충분히 해석이 가능한 장면이다.
“누가 자꾸 문을 두들기고 자꾸 들어올라켜, 어떤 아재가 자꾸 들어올라켜” 밤새 고통에 울부짖던 효진이가 평소에 좋아하지도 않은 생선을 엄청나게 먹어치우고 있다. 여기서 악령이 들린 것으로 보이는 효진이 허겁지겁 먹는 게 ‘생선'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면 부활한 예수를 만난 두 제자가 육체가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고 나서 대접한 음식이 생선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예수가 생선을 먹는다는 것은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며 이는 초월적인 존재가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악령이 들린 효진은 일본인과 연결되고 그가 생선을 먹는 다는 것은 신적 존재임과 동시에 육체적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기독교적 레퍼런스를 끌고 들어와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 집에 다시 찾아가 보기로 한 날, 오성복은(동료경찰) 조카 ‘양이삼’을 데리고 왔다. 양이삼은 가톨릭 신부를 보좌하는 부제이다. 아직 정식 사제가 아닌 그래서 인간의 때를 완전히 벗지 못한 어중간한 인물이다. 그가 통역자라는 특징은 가톨릭 성직자인 것과 사실상 같은 의미다. 언어가 달라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매개해주는 역할과 신의 대리자로서 신과 인간사이를 매개해 주는 것은 비슷한 맥락이다. 종구는 이름을 묻고 그는 “양이삼이요”라고 대답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종구가 차를 향해서 가다가 “본명이여?”라고 묻는다. 이름마저 사람 이름 같지 않고 어중간하다는 뜻이다.
영화적으로 이름에 악센트가 주어져 있는 이 장면에서 혹시 이름에 기독교적 레퍼런스가 담겨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양. 이. 삼. 숫자의 향기가 강하게 느껴지는 이름에서 ‘223’ 2가 두개고 3이 하나, 그래서 22장 3절. 공포영화나 묵시록적인 상황에서 자주 인용되는 요한계시록이 떠오른다. 요한계시록 22장 3절 ‘다시는 저주가 없고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그 안에 있을 것이며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리니’ 나홍진 감독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피해자들을 이해하기 위해, 위로하기 위해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즉 양이삼이라는 이름에 '다시는 저주가 없다'는 의미를 넣고 그를 희생시킴으로써 바람을 실현시키고자 한 의도가 아니었을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측이며 하나의 견해로써 충분히 즐기시기를 바란다.
처음 찾아간 일본인의 집에서 밀실을 발견한 오성복은 크게 놀란다. 그 좁고 어두운 공간에는 그동안 희생된 사람들의 사진들로 빼곡하게 차있고 그러는 사이 종구와 양이삼은 검은개랑 한바탕 소동을 벌인다. 일본인이 집에 돌아오자 개는 흥분을 멈추고 셋은 왜놈을 맞닥뜨린다. 무단침입을 하면서까지 방을 뒤졌던 그들은 죄인 얼굴을 하고 도망치듯 그 집을 빠져나왔다. 네팔의 샤머니즘에는 무당이 좁은 공간에 들어가 촛불을 켜고 그 안에서 은밀한 의식을 하는 방식이 많다고 하는데 이를 취재하기 위해 감독이 직접 네팔로 날아갔다고 한다. 이렇게 일본인과 네팔의 샤머니즘을 접합시켜서 혼종적이면서도 이색적인 볼거리를 만들어냈다.
차 안에서 오성복은 그 왜놈이 범인임을 확신하고 비에 흠뻑 젖어 넋이 나간 얼굴로 종구한테 효진이 실내화를 건넸다. 종구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실내화를 들고 가서는 딸한테 물었다. 동네에 일본사람 아냐고 어디서 만나서 뭘 했냐고 다그치며 물었다. “나가 왜 말해야 되는디?” “중요한 문젠께” “뭣이 중헌디” 이 장면에서 2016년 최고의 영화대사가 탄생했다. 뭣이 중하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연출에서 나는 정신적 쇼크를 받았다. 악령에 씌여 마치 존재 자체가 역전된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장면은 두 사람이 부녀관계라서 더 충격이 심했다. 딸의 가장 극적인 순간에 딸의 입으로 그 대사를 말하게 함으로써 큰 효과를 가져왔다. “뭣이 중헌디”라는 대사는 그 자체로 굉장히 인상적인 동시에 영화적으로도 훌륭한 대사라고 할 수 있다. 가족에게 닥친 모든 불행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사투를 벌이지만 결국 ‘뭣이 중헌지’ 몰랐던 한 남자의 무력감을 토로하면서 영화가 끝나기 때문이다. 짧은 대사에 주제가 함축되어 있다는 것은 그것이 훌륭한 대사임을 증거한다.
효진이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자 종구는 양이삼을 데리고 일본인을 또 찾아간다. 여권을 살펴보며 사진을 찍는데 휴대폰 액정을 자세히 보면 일부러 일본인의 얼굴이 나오게끔 각도를 돌려 찍는다. 영화 후반부에 종구가 일본인을 치여 죽이게 되는 장면을 떠올려 보면 산 사람의 사진을 찍고 그 사람을 죽이는 영화의 설정을 종구가 그대로 되풀이 하는 점이 흥미롭다.
여기 뭐 하러 왔냐고 넌 누구냐고 종구가 물었지만 일본인은 말해줘도 믿지 못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초월적 존재를 인간이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떠나라는 말에 대꾸를 하지 않는 일본인을 보고 화가난 종구는 곡괭이로 방을 때려 부수고 그가 키우던 검은색 개까지 때려 죽였다. 그러면서 3일 안에 짐 챙겨서 떠나지 않으면 죽인다고 경고했다. 3이라는 숫자와 죽음은 기독교에서 가져온 내용으로 보인다.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는 예수의 이야기는 하나의 복선으로써 일본인의 운명에 그대로 적용된다고 봐야한다.
일본인은 염소의 사체를 대문 앞에 매달아 존재를 드러낸다. 일종의 경고 메시지다. 앞으로 또 설명하겠지만 이 영화에서 일본인과 관련된 동물은 죄다 검은색 계통으로 등장한다. 검은색 개, 까마귀, 닭, 염소 등이다. 색깔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 영화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아침에 한바탕 소동 때문에 일어나다가 넘어진 종구는 한의원에 침을 맞으러 가고 그 사이 잠시 옆집 할머니 댁에 딸을 맡겼다가 또 난리가 났다. 이제 어떻게든 뭐라도 해야한다. 이해할 수 없는 불행이 집으로 찾아오고 가족의 생사를 위협한다면 어떻게든 발버둥쳐야 한다. 뭐든 해야만 하는 간절함이 극대화되는 시점에 영화는 새로운 인물의 등장으로 완전히 새 국면을 맞는다.
마치 굿 판이 벌어지는 듯한 음악이 웅장하게 깔리면서 일광(日光)이 등장한다. 이 장면에서 황정민(일광)이라는 배우가 가진 존재감은 가히 압도적이다. 굽이굽이 비탈진 산길을 헤치고 곡성으로 내려가는 것은 마치 어떤 초월적 존재가 인간세상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지인 작가, 평론가
destiny2135@gmail.com